연혁
본 천연물과학연구소는 대학교 소속 연구소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연구소로서, 80여년간 열악한 환경에서도 연구소를 지키고 지원하여 준 대학당국의 굳건한 의지와 오로지 천연물연구에 모든 것을 바친 전직 교수님들과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연구원들의 자기 희생이 결집된 결과로서 현재의 연구소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이제는 최고(最古)의 근현대 과학연구소에서 최고(最高)의 첨단 천연물과학 연구의 중심으로 도약하여 천연물 기반 신약개발로 인류에 기여하겠습니다.
2021
07
천연물과학연구소 입주건물(20동) 준공식
2019
03
천연물과학연구소 입주건물(20동) 재건축 착공(준공예정 : 2021. 07)
12
천연물과학연구소 개소 80주년 국제심포지엄 개최
2008
02
천연물과학연구소가 약학대학 소속으로 위치 변경에 따라 관악갬퍼 스(20동)로 건물 이전
2001
01
보건복지부로부터 “천연물신약연구개발 촉진법” 제12조 및 동법 시 행령 제 12조의 규정에 의하여 “천연물신약연구개발 전문기관”으로 지정됨
09
The Institute was merged with the College of Pharmacy according to the reformation of all research institutes in the University
1998
02
기반기술연구동 준공
03
천연물과학대학원(박사, 석사) 협동과정 개설
10
일본 토야마 의과약과대학 화한약연구소와 학술교류 협정체결
1992
03
천연물과학연구소로 명칭 변경
04
천연물화학연구부, 생물활성연구부, 자원개발연구부, 산업기술연구부, 자원식물시험장, 기기관리실, 방사성동위원소실, 실험동물관리실, 천 연물문헌정보실, 행정실로 기구가 확대·개편됨.
08
과학기술처로부터 선도기술개발사업 (G7프로젝트)의 하나인 “新東醫 藥開發” 주관 연구 기관으로 선정
09
과학기술처로부터 “韓·中傳統東洋藥物協力硏究센터”로 지정
1980~1989
축적된 연구력의 결과로 신물질의 발견 빈도가 늘어나, 생물활성을 탐색하게 되어 “生藥으로부터 新藥開發”의 기반 조성을 다지게 된 시기이다. 1983년도에는 200평 규모의 연구동 증축도 이루어졌다. 전통약물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어 WHO는 본 연구소를 “전통약물연구 협력기관”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뒤늦은 물질 특허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발견들이 신약으로 실용화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국내 여건에 좌절도 맛보아야 했다.
80년대는 自然科學大學, 農科大學 등에서도 천연물 연구를 활발히 시작한 시기 이기도 하다. 이러한 天然物의 연구의 확산은 生藥만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아니라 天然色素, 天然農藥 등의 有用 天然物로 연구영역을 확대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의 天然物科學研究所로 확대 발전하는 계기를 맞이하고 여기에서 앞으로의 반세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또한 1988년 WHO로부 터 전통약물협력연구센터로 지정받아 동남아지역 관련연구센터와의 교류·연구협력을 활발히 하게 되었다.
1970~1979
이 시기는 천연물연구가 활성화되는 때였다. 그간 축적된 연구력은 국제공동연 구회와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지원으로 미국, 홍콩,스리 랑카 등과 “생약으로부터 피임제 개발” 공동연구가 수행되었고 UNESCO로부터 는 “동남아지역 천연물화학 연구센터”로 지정 받아 동남아시아 여러나라의 천연 물과학자를 훈련하는 임무도 맡게 되었다.
1960~1969
서울 聖水洞試驗場을 정리하여 새로운 연구동도 건축하고 資源植物試驗場도 始 興市에 마련하는 등 본격적인 연구소 재건이 시작되었다. 이때 첨단장비인 핵자 기공명장치(NMR)도 갖추게 되어 천연물화학 연구에 열정을 쏟게 되었다. 해방후 처음으로 우리 손에 의해 천연물 화학성분의 화학구조 결정을 하였다. 이 물질이 Acertannin Polygallitol이다.
1950~1959
한국동란의 참화는 연구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수들은 흩어지고 그나마 마 련한 연구기자재는 소실되고 말았다. 연구 이전에 생존이 문제였던 시기였다.
1945~1949
이 시기에 生藥研究所도 京城大學校, 國立 서울大學校, 서울大學校 등으로 그 소 속이 바뀌게 되었다. 이 기간중에 어려웠던 일 중의 하나는 조국의 분단으로 인 하여 연구소가 開城市에서 현재의 蓮建캠퍼스 로 옮겨오는 일이었다. 그러나, 天 然物硏究에 대한 의욕으로 우리의 손에 의해 한국 최초로 유기원소분석기를 만 들어 연구에 이용하였다. 이때 제작된 원소분석기는 아직도 본 연구소에 간직되어 있다.
1939~1945
1939년 12월 27일 京城帝國大學附屬 生藥硏究所가 최초로 설립된 곳이 京畿道 開城市 雲鶴洞이다.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한반도를 비롯하여 중국의 한약자원의 조사로 집대성한 것이 “Chinesische Drogen”이다. 이때의 생약표본 약 15,000점 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이들 표본은 한약을 상용하는 한·중·일의 한약표본의 기준이 된다. 아열대식물자원 연구를 위하여 濟州道 西歸浦 西紅里에 試驗場도 설치하였다.